
화성행궁
華城行宮성보다 먼저 지은 궁, 정조가 여드레 동안 자기 정치를 다 보여 준 자리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 곁에 새 도시를 세우면서 지은 임시 궁궐이다. 흔히 성곽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순서는 반대다. 행궁이 1789년이고 성곽은 1794년에서 1796년이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이곳에서 여드레를 보냈는데, 그 여드레가 조선을 통틀어 가장 촘촘하게 기록된 왕실 행사로 남았다.
📖 이야기
정조는 즉위 내내 아버지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감당해야 했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녔고, 그는 그 부담을 숨기는 대신 도시 하나로 만들어 세웠다. 1789년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고을을 팔달산 아래로 통째로 이전하면서 그 중심에 행궁을 앉힌 것이다. 규모는 576칸으로 조선의 행궁 가운데 가장 컸다. 성곽은 그로부터 5년 뒤에야 착공했으니, 이 자리에서는 궁이 성보다 먼저다. 왕이 도성을 떠나 머물 곳을 이만한 규모로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화성이 행차용 별장이 아니라 제2의 수도로 구상됐다는 뜻이다.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여드레 동안 이 마당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정조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윤2월 13일 봉수당에서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열었고, 낙남헌에서는 이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치른 문무과 별시의 급제자를 발표하고 노인들을 초청해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튿날에는 신풍루 앞에 나가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의지할 데 없는 노인, 그리고 가난한 백성에게 쌀과 소금을 나누어 주고 죽을 쑤어 먹였다. 효도와 인재 등용과 구휼을 한자리에서, 그것도 도성 밖에서 백성이 보는 앞에 펼쳐 놓은 것이다. 이 여드레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여덟 폭 병풍 『화성원행도병』에 그림과 글로 남아, 오늘날 조선 왕실 행사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됐다.
그리고 이 궁은 거의 사라졌다. 1905년 객사인 우화관 자리에 소학교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1911년에는 정전인 봉수당이 자혜의원이 되고 낙남헌은 군청, 북군영은 경찰서로 쓰였다. 1923년에는 일부를 헐어 내고 그 자리에 도립병원을 새로 지었다. 낙남헌은 그 시간을 헐리지 않고 견뎠다. 복원은 1996년에 시작해 2003년 10월 482칸을 열었고, 학교가 옮겨 간 뒤에야 손댈 수 있었던 우화관 일대 94칸이 2024년 4월에 마무리됐다. 훼손이 시작된 해로부터 119년이 걸린 셈이다. 그래서 이곳을 볼 때는 건물의 나이가 아니라 도면의 나이를 보아야 한다.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었다.
✦ 볼거리
- ›봉수당행궁에서 위계가 가장 높은 정전.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린 바로 그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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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름은 장남헌이었는데, 회갑을 맞아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수(壽)' 자를 넣어 봉수당으로 고쳐 불렀다. 앞마당에는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가 깔려 있고 건물 앞에는 월대를 두었다. 행궁이면서도 격식은 정궁에 준해 갖춘 것인데, 이 한 채가 정조에게 수원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 ›낙남헌벽 없이 트인 구조의 행사용 건물.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헐리지 않고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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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한 고조 유방이 낙양의 남궁에서 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푼 고사에서 왔다. 1795년에는 이 앞에서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의 급제자를 발표했고, 노인들을 모신 양로연도 열었다. 지금 보이는 다른 건물이 대부분 도면을 따라 되살린 것인 데 반해 이 건물은 그 시간을 그대로 통과했다. 마루에 서서 마당을 보면 왜 벽을 두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 ›신풍루행궁의 정문. 아래층은 출입문이고 위층에는 북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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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름은 진남루였다가 1795년에 신풍루가 됐다. '신풍'은 한 고조의 고향인 풍(豊) 땅에서 따온 말로, 정조가 화성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는 뜻을 담았다. 이 문 앞이 1795년 윤2월 진휼이 이루어진 자리이기도 하다. 임금이 궁문 밖으로 나와 굶주린 백성에게 직접 쌀을 나누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겨 두었다는 사실이, 이 행차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준다.
- ›노래당과 미로한정정조가 왕위를 물려준 뒤 화성에서 보낼 노년을 염두에 두고 지은 별당과, 후원 언덕의 작은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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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당은 '늙음이 온다'는 뜻이고, 미로한정은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정조는 1800년에 마흔여덟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 건물들이 뜻대로 쓰인 적은 없다. 화려한 전각들을 지나 언덕 위 작은 정자에 올라서면, 계획으로만 남은 노년이 이 행궁에서 가장 조용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화령전 운한각행궁 옆에 따로 자리한 영전. 정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01년에 그의 어진을 모시려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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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인 운한각과 어진을 잠시 옮겨 두는 이안청이 복도각으로 이어진 ㄷ자 구성이고, 이 세 건물이 2019년 보물로 지정됐다. 행궁이 사적이고 화령전이 별도의 사적이라 지정이 서로 다르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살아 있는 임금이 머물던 곳 옆에 죽은 임금을 모신 곳이 나란히 선 구도라 함께 보아야 뜻이 맞는다.



🚶 혼자 둘러보기 코스
- 1신풍루행궁의 정문에서 시작한다. 문 앞 광장이 넓어 행사가 자주 열린다.💡 정문을 등지고 서면 행궁 앞 거리가 그대로 보인다. 여기가 1795년 진휼이 있었던 자리다.
- 2좌익문과 중양문정전에 이르기까지 문을 두 번 더 지난다. 문이 겹칠수록 안쪽의 위계가 높아진다.
- 3봉수당어도와 월대를 갖춘 정전. 1795년 회갑 잔치가 열린 자리다.💡 가운데 높은 길은 임금이 다니던 어도다.
- 4유여택정조가 신하들의 보고를 받던 건물. 정전 옆에 붙어 있다.
- 5낙남헌벽이 없는 개방형 건물. 헐리지 않고 남은 건물이라 결이 다르다.💡 이 코스에서 가장 오래 서 있게 되는 자리다.
- 6노래당과 득중정정조가 노년을 위해 지은 별당과, 활을 쏘던 정자가 이어진다.
- 7미로한정후원 언덕으로 조금 오르면 나오는 작은 정자. 행궁 지붕들이 내려다보인다.💡 행궁에서 사람이 가장 적은 자리다.
- 8화령전담을 돌아 나가면 정조의 어진을 모신 영전이 있다. 운한각 편액을 확인하고 들어갈 것.💡 행궁 관람권으로 함께 볼 수 있는지는 매표소에서 확인하는 편이 낫다.
🧭 방문 정보
💡 알아두면 좋은 팁
- 행궁만 보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면 넉넉하다. 뒤편 팔달산으로 올라 서장대와 성곽까지 걸으면 반나절 일정이 된다.
- 무예24기 시범공연이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1시에 약 30분간 열린다. 월요일과 한여름 혹서기에는 쉬고 장소가 조정되기도 하니 당일 안내를 확인할 것.
- 화성행궁과 수원화성박물관, 수원박물관을 함께 보는 통합관람권이 있다. 두 곳 이상 볼 계획이면 매표소에서 물어보는 편이 낫다.
- 행궁 앞까지 오는 지하철역은 없다. 1호선이나 수인분당선 수원역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하고, 걸어서 갈 거리는 아니다.
- 행궁 뒤가 바로 팔달산이라 성곽 쪽은 오르막이다. 성곽까지 볼 생각이면 신발을 신경 쓰는 편이 낫다.
🗺 함께 둘러보기
화성행궁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1789년에 세운 행궁으로, 1794년에서 1796년에 쌓은 화성 성곽보다 먼저다. 1795년(정조 19) 윤2월의 을묘원행이 핵심인데,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여드레 동안 이곳에 머물며 봉수당에서 진찬을 올리고 낙남헌에서 문무과 별시와 양로연을 열었으며 신풍루 앞에서 백성을 진휼했다. 이 행차의 전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원행도병』으로 기록되어, 규장각과 장용영, 수원 화성으로 이어지는 정조의 개혁 정치를 보여 주는 대표 소재로 출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