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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 Altostratus, CC BY-SA 4.0

오죽헌

烏竹軒

검은 대나무에 둘러싸인 집,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자리

조성 연대15세기 건립, 1963년 보물 지정🧭 여기 방향 보기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아들 율곡 이이를 낳은 집이다. 이름은 집을 두른 검은 대나무 오죽(烏竹)에서 왔다. 15세기에 지어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살림집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금 쓰는 5천 원권 앞면에 이이의 초상과 함께 이 집이 그려져 있고, 5만 원권 인물이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 이야기

이 집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소유의 계보다. 강릉 최씨 집안이 지은 집은 최응현의 사위 이사온에게, 이사온의 사위 신명화에게, 다시 신명화의 사위 권처균에게 넘어갔다. 네 번의 승계가 모두 딸과 사위를 통했다.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조선의 상속이 실은 조선 전기까지 딸과 아들을 크게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한 채의 집에 계보로 남아 있다. '오죽헌'이라는 이름도 마지막 상속자인 권처균의 호에서 왔다. 집이 사람에게 이름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집에 이름을 준 셈이다.

신명화의 딸 신사임당은 1536년 이 집의 별당에서 아들을 낳았다. 검은 용이 바다에서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 그 방을 몽룡실이라 부른다. 그렇게 태어난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두 축이 되었고, 두 사람의 학문은 뒤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갈라져 붕당의 학문적 뿌리가 된다. 1788년 정조는 이이의 친필 격몽요결과 그가 어릴 때 쓰던 벼루를 보관할 어제각을 세우라 명했다. 왕이 신하의 생가에 건물을 지어 준 것이다.

볼거리

📷 Christophe95, CC BY-SA 4.0

🚶 혼자 둘러보기 코스

  1. 1자경문
    경내로 드는 문. 이름은 이이가 스스로를 경계하려 지은 글 '자경문(自警文)'에서 왔다.
    💡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나온다. 여기서부터 오죽 숲이 길 양옆을 따라간다.
  2. 2오죽헌 본채와 몽룡실
    이이가 태어난 방이 있는 별당. 정면 3칸의 작은 집이라 서둘러 지나기 쉽다.
    💡 툇마루 앞에서 처마 밑 짜임을 한 번 올려다볼 것.
  3. 3율곡매
    본채 뒤편 모퉁이의 매화나무. 수령 약 600년의 천연기념물이다.
    💡 3월 말 개화기에도 꽃은 남은 가지에만 핀다.
  4. 4문성사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 뒤로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선다.
  5. 5어제각
    정조가 세우게 한 전각.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한다.
    💡 단청을 올린 유일한 건물이라 멀리서도 눈에 띈다.
  6. 6오죽헌·시립박물관
    같은 담장 안에 있는 박물관. 향토 민속 자료와 강릉 지역 출토품을 함께 본다.
    💡 입장권 한 장으로 함께 들어간다. 1월 1일·설·추석 당일에는 이 실내 전시실만 닫는다.
  7. 7오죽 숲
    집 이름의 유래가 된 검은 대나무 숲. 줄기가 실제로 검다.
    💡 나올 때 담장을 따라 걸으면 마지막에 만난다.

🧭 방문 정보

관람 시간
09:00~18:00 (입장 마감 17:00)
휴무
연중무휴. 다만 1월 1일·설·추석 당일에는 실내 전시실만 휴관하고 오죽헌 경내는 개방한다.
요금
어른 3,000원 (단체 2,000원) · 만 65세 이상, 미취학 아동, 강릉 시민 무료
가는 법
강릉에는 지하철이 없다. KTX 강릉역에서 시내버스 또는 택시로 이동한다 (노선 개편이 잦아 현장에서 확인할 것).
2026-09 기준

💡 알아두면 좋은 팁

🗺 함께 둘러보기

경포대와 경포호차로 이동
관동팔경의 누각과 그 앞의 석호. 강릉 여행에서 오죽헌과 함께 묶는 짝이다.
선교장약 1.5km
조선 후기 사대부 살림집이 통째로 남은 곳. 오죽헌에서 약 1.5km 떨어져 있다.
강릉·시립박물관경내
오죽헌과 같은 담장 안에 있어 입장권 한 장으로 함께 본다.
📚 한능검 포인트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다. 이이는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축을 이루었는데, 이황이 「성학십도」에서 군주 스스로의 수양을 앞세운 데 비해 이이는 「성학집요」와 「동호문답」에서 현실 제도의 개혁을 강조했다. 두 사람의 학문은 뒤에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갈라져 붕당의 학문적 뿌리가 된다. 이 집이 딸과 사위를 따라 네 번 상속된 것도 조선 전기의 재산 상속 관행을 보여 주는 사례다.